[이정랑 칼럼 6] 조조와 제갈량의 인재 활용술

"조조(曹操)의 용인술(用人術)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탁월했다"

이정랑 | 입력 : 2018/02/12 [00:37]

고대 중국의 전통적인 관념에 따르면 어진 사람에게는 적이 없는 법이고 천하는 덕 있는 자가 통치하는 것이 마땅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어떤 시기에는 간웅(奸雄)이 천하를 손에 넣기도 했던 것이다.

 

조조(曹操 154~220)가 전형적인 간웅이었다는 사실에는 역사가들 사이에 이론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장점이 어디에 있었는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조는 음흉하다 하여 세칭 ‘귀역(鬼역)’이라고 불렀다. 대부분의 평자들이 그를 심술궂고 간사한 인물로 여겼으며, 정인군자(正人君子)들은 하나같이 그를 폄하하고 배척했다. 하지만 그가 충신이었는지 간신이었는지, 그리고 그의 행위가 옳았는지 그른 것이었는지는 논외로 하고, 인재를 알아보고 활용하는 그의 인재관리의 지혜와 방법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순욱(荀彧), 순유(荀攸), 허유許攸), 곽가(郭嘉), 가후(賈詡) 등은 조조의 중요한 모사들로서 매번 중대한 일을 만날 때마다 조조는 이들과 상의하여 함께 일을 도모했다. 이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조조는 절대로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조조의 수하에 있던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임무에 충실했다. 조조는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장점을 극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모두들 능력의 대소에 관계없이 탁월한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관중(關中)은 막 수복되어 형세가 매우 불안정했고, 마등(馬騰)과 한수(韓遂)는 아직 마음을 조조에게 돌리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는 사예교위(司隸校尉) 종요(鍾繇)를 보내 관중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마등과 한수의 아들들을 수하에 두고 인질로 삼음으로써 관중 일대는 안정을 찾게 되었다.


또한 조조는 마음 씀씀이가 대단히 진지하고 일처리가 주도면밀한 조지(棗祗)와 임준(任峻) 두 사람을 둔전교위(屯田校尉)로 임명함으로써 짧은 기간에 부국강병을 이룩했고, 위개(衛凱)를 중용하여 관중을 보살핌으로써 국가의 이재(소금)를 돌보게 했다. 병주(竝州)가 막 평정되었을 때는 양습(梁習)을 자사로 파견하여 다스리게 함으로써 변방의 안정을 이루었고, 풍익(馮翊)에 도적떼가 창궐하여 소요가 그치지 않자 정혼(鄭渾)을 보내 이들을 소탕하고 민생을 안정시켰다. 이 모든 치세의 방법과 계략들이 조조의 전국 통일과 정치적 안정에 커다란 기반을 마련해주었다.

 

조조에게는 명장들이 유난히 많았다. 이는 위, 촉, 오 삼국 중 다른 촉이나 오나라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문제였다. 장요(張遼)는 합비에서 손권을 대승한 바 있고, 곽회(郭淮)는 양평에서 촉군을 무찔렀으며, 서황(徐晃)은 양번에서 관우의 발목을 잡은 적이 있다. 이들 명장들은 조조의 확실한 신임과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여 커다란 성공을 거두면서 조조의 성공에 일정한 몫을 했다.

 

조조가 군웅(群雄)을 제압하고 천하를 좌우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그의 수하에 있던 인재들의 문치와 무공 덕분이었다. 조조의 사상에 유가적 요소들은 크게 드러나지 않고 있지만 그의 뇌리 깊숙한 곳에는 전국시대 백가(百家)의 다양한 사상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상통하고 있다. 결국 인재 관리에 있어서만큼은 조조가 유생들의 지혜를 앞서고 있었던 것이다.

 

조조가 간사하다고 하지만 그가 진짜 간사해서 간사한 것이 아니다. 그 간사함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고 또한 권모술수가 있으며 책략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를 영웅이라 해도 좋고, 간웅이라고 해도 그만이다. 조조가 사람들에게 주는 느낌은 ‘두려움’과 ‘복종’이다. 그러나 그를 ‘증오’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진정한 간신은 사람들에게 증오와 고통을 주며, 그 간사함의 본질은 아무도 변화시키지 못한다.

 

사람을 얻는 것도 어렵지만 인재를 얻는 것은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생각을 조금만 바꿔보면 주위에 널린 것이 인재들이다. 천리마는 어디에도 있지만 이를 알아볼 수 있는 백낙(伯樂)이 항상 있는 것이 아니라는 데 인재 활용의 어려움이 있다. 잘 찾아 쓰기만 하면 주위의 모든 사람이 인재이지만 방기해두면 모두가 쌀 지게미(米糠)에 불과한 것이다. 그런데 조조는 이를 몸소 극복하면서 수많은 인재를 등용하고 활용했던 탁월한 용인술을 펼쳤던 사람이다.

 

▲이정랑 언론인   ©오산시민신문

 

 

 

 

 

이정랑 언론인(중국고전연구가.  현 서울일보 수석논설위원) j643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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