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림터 12] 농활의 추억

이유섭 | 입력 : 2015/07/23 [16:45]

서울태생이라 농사짓는 것을 가까이서 경험해본적도 없고, 들에 나가 나물 캐기를 해본 기억도 별로 없이 처음으로 농활을 갔다. 90년대 초의 일이다.

 

농활 가기 전 기본적인 정신교육(?)과 생활교육을 받았다. ‘논에 들어가서는 피를 몇 개 이상 뽑기 전에는 허리를 펴지 마라, 밭일 할 때는 몇 미터 이상 전진하기 전에는 일어서지 마라, 일이 힘들어도 절대 인상 쓰지 말고 웃으면서 해라 ~~’부터 시작하여 어르신들에게 인사하는 방법과 밥상 차리는 순서까지 구구절절 교육을 받았다. 그리고 입지도 못할 옷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나는 농활을 떠났다.


첫 작업은 배추를 뽑는 일이었다. 일이 꼬이려고 했는지 작업반장선배가 일에 대한 설명을 할 때 나와 같은 조에 편성된 동기는 방에서 썬 크림을 바르고 있었던 것 같다.


배추밭에 도착하여 교육받은 대로 일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허리를 피고 일어설 때 허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아파서 구부린 채 이동할 만큼 열심히 일했다. 그리고 동기와 함께 웃고 이야기하며 일의 힘듦을 내색하지 않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커져가는 만큼 선배들의 침묵이 깊어짐을 눈치 챌 여유가 없었다.
 
낮의 농사일보다 더 힘들고 지치는 일과평가 시간이 되었고 밤이 깊도록 피곤함에 감겨 오는 눈꺼풀과 싸우며 나와 동기는 선배들의 심한 질타와 비판을 받았다. 우리는 머리를 폼으로 달고 다니는 생각 없는 서울촌것들이 되어버렸다.
 
그 배추는 뽑혀서 버려지는 것이었다. 배추가격 폭락으로 팔수도 버릴 수도 없는 짐이 되어버린 배추들이었다. ‘듣지 못했다, 그래도 열심히 일했다 ’항변을 했지만 변명일 뿐이었다. 억울했던 것 같다. 이해가 되지 않았으므로…….
 
억울한 마음이 커서 잊혀지지 않았던 그 일이 죄송함과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 온 것은 한살림조합원이 된 이후다. 생산자님들의 수기 집에서 삶을 내려놓고 싶을 만큼 고통스러웠던 최악의 ‘배추파동’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농활은 생산자들 입장에서는 손님맞이일 수도 있다. 안전사고 없이 돌아가면 다행이다. 피인지 벼인지 구별도 못하는 마당에 농사일에 큰 도움이 될 리도 없다. 도시 소비자들의 생산지 일손 돕기나 농촌 체험도 별 다를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농활이나 도시소비자들의 일손 돕기가 지속되기를 바란다.
 
실수 많았던 농활의 추억과 일손 돕기의 경험을 몸이 기억해내고 비도 없이 이어지는 폭염의 날씨를 바라보며 함께 근심하고 걱정하게 될 것이다. 가뭄으로 타들어가는 농지를 바라보는 그 절절한 마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밥의 소중함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어쩌면 갈라진 논에 물을 뿌려 헤집어 상처를 주는 일보다 폭락과 폭등을 반복하는 불안정한 농업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진정한 위정자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 이유섭 이사장     ©오산시민신문

 

 

 

 

 

 

 

 

이유섭

한살림 경기서남부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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